4.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 보기
우리 삶의
'통과의례'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삶의 통과 의례'이다.
모호한 인생의
과정 속에서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게하기 위해서 남자
아이들에겐 일정한 행사를 전통적으로 치르게 했다. 한국에서는 뒷 산
의 바위를
지고 일정한 장소에 옮기는 것이나 아프리카에선 전투와 사
냥 등으로 통과의례를 치르게 했다.
민속학과 인류학에선 이 통과의례의 풍습이 아주 중요한 연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각기 다른
통과의례 속에 각기 다른 그들의 삶의 방
식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들은 이 통과의례를 거치면 보통 어른으로 대접을 해주면서
품삯도 반 품삯에서 한
품삯으로 올려주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성
들에게는 이런 일정한 사회적인 '통과의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냥과 협업적인 농사일에 종사하는 남자 보다는 자녀의 출산과
집 안에서 사는 삶의
방식에서 오는 이유도 있었지만 여성의 사회적인
몫보다는 출산이라는 운명의 굴레에서 '생리의 시작'을 통과의례의 일종
으로 묵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적인 의미에서 일정한 '통과의례'로 보편적인 성인식을 하던
시대는 이젠 벗어났다.그러나
인간의 내부에 대한 들여다보기와 성찰이
시작된 르네상스 이후에 몇 겁을 거듭나며 '내면적인 통과의례'를 치를
수 밖에 없는 삶에
사람들은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 이후, 인간의 내면적인 통과의례에 대한 과정과 진통을
그린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서>, 카프카의 <변신>, 섬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 등
둥은 성장기의 아픔과 그 변신의 과정을 그린 작품들이다.
마치 나비가 탄생하듯이 땅벌레에서 물벌레로 다시 날개를 갖고 날기까
지의 그 진통기의 아픔에
대해서 주목을 하고 그것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나온 그 '조나단 리빙 스턴 시걸'은 바
로 비상을 위한 통과의례에
도전하는 갈매기의 꿈을 그린 이야기다. 사실
우린 걷고 마시고 숨을 쉬며 산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숨쉬기와 걷고 마시는 것을 생각하
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삶 속에 마치 조개 살 안의 영롱한 진주 같은
보석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무의미 속에서의 첫번째
통과의례
삶 속에서 우리들의 의미와 무의미 찾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영화 <피
아노 1993>는
여자란 무엇인가를 한편으로 보여주며 여성으로서의 내면
적 통과의례 과정을 드러내 주고 있다.
남자 아이들이 고추가 여물며 상대성을 보았을 때 그것이 서기 시작하고
여자 아이가 생리를 시작하는
시점을 이젠 통과의례의 과정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한 사람의 어른이 되기에는 수 많은 내면적인 진통이 따르고 이 내면적인
진통이 따르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한다. 피아노를 감독한 제인 캠피온
은 '인류학'을 공부한 여성이다.
그런 그녀의 기본적인 지식의 바탕이 아주 깊게 반영된 작품이 피아노이다.
에이다라는 한 여성의 삶을
통하여 여성의 속성과 여성으로써 거치는 삶의
역정을 보이지 않는 통과의례로 슬며시 밀어 넣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에이다의 첫 출산은 마치 보통 여인의 삶의 과정처럼 '실수
와 삶에 대한 호기심의
반영'으로 그녀는 밀어 넣고 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한 남자에게 중매라는 형식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것은 현재 한국 여자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중매라는
제도와 불확실한 사랑에 대한 확신을 사회적 제도 속에 무작정 자신을 밀어넣고
있는 여인의 삶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100여 년전의 여인인 에이다는 그렇게 시집을 가고 얼겁결에 딸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에이다의 첫번째 통과의례이듯 보편적 여인들의 통과의례이다.
기존의 제도에 대한 항명할 수 없이 그렇게 해야되는 중 알고 숙명처럼
받아들인 멀지 않은 시대의
모든 여인들의 삶이 그렇게 반영되어 있다.
대부분의 여인들이 이러한 숙명적인 과정 속에서 첫번째 통과의례를
치른다.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의 진통과 두번째의 통과의례
그러나 에이다가 이야기거리가 되고 영화의 주제가 된 것은 그렇게 삶을 묻은 것이 아니라
다시 특별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중매 결혼,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시집을 와 그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
사실 객관적인 상황에서 에이다는 원주민인 베인즈를
선택할 여지가 없다. 같은 백인에 같은 문화를 가진 영국인과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원주민인 베인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결혼
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여인으로 도덕적 법적, 사회적으로 그녀는 제 2의 선택을 할 권리도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에이다는 외간 남자를 선택하지만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남편이 그녀를
방에 가두고 못질을 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
이고 남편이 자기의 손가락을 자르고 난 후에 강한 저항을 하지 않은 것
은 자기의 선택과
사랑에 대한 죄의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당연 그녀가 영국인 남편을 거부하고 '베인즈'를 선택한 것은 바로 '의미
와 무의미'의 갈등
속에서 의미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선택의 갈등은 쉬운 것이 아니다, 이 갈등하는 내면을 어린 딸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감독은 이 영화 안에서 딸을 통하여 분화된
여인의 내면을 본능적인 욕망을 드러내기를 시도하고 있다. 즉 9살 난 딸은
그녀의 내면의 모습이고 여자의 보편적인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딸은 자기 엄마의 과거를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서 곧잘 거짓말을 한다.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꾸며 엄마의 삶에 걸어놓고 주위사람에게 말하
기도 한다.
이 어린 딸의 갈등은 영화 속 곳곳에 나타난다. 베인즈에게 가자는 것을
양부가 싫어한다며 거절을
하고 끝내 마지 못해 억지로 동행하는 모습은
사실 에이다의 내면적 갈등의 표현이다.
또 에이다가 피아노 건반을 싸주자 어린 딸은 두 갈래 길에서 망서리다
엄마의 말을 거절하고 그것을
양부에게 갖다주며 고자질 한다. 어린 그
녀의 말이 재미있다. 이것을 이리로 가져와야할 것 같아서 가져왔다는 식
으로
말한다.
실상은 이것이 여자이다. 여자란 무엇인가를 이 장면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
난다. 이 딸의 모습도
에이다의 내면의 갈등의 반영이다. 물론 겉으로 드
러난 이야기 속에 사랑의 메시지가 적힌 피아노 건반을 베인즈에게 갖다
주지 않고
양부에게 가져간 것은 자기의 엄마의 손가락을 잃게 한 철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내면적인 구조에서 이것은 여자의 본능이고 속성의 한 부분일 뿐이
이다. 즉 자기의 베인즈에
대한 사랑을 남편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을 우
회적 상징적으로 그려진 것이다.
여자들은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다. 즉 '드러냄'이
언젠인가 문제일 뿐이다.
에이다는 자신의 그런 마음을 남편이 알기를
내면적으로 기대하고 있었고 그 장면은 그런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누설(expose)은 이렇게 여인의 본능적인 속성이다. 파트너가 있는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을 때, 여자들은 일정한 시기에 그 남자의 여자에게 자신
을 일부러 드러낸다. 그것이 불륜이던 사회적 지탄을 받던 상관하지
않고
스스로 드러내고 누설해 버린다. 물론 이 '누설'은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여
자의 욕망이고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지만 여자의
입장에선 본능적인 갈구일
뿐이다.
에이다는 손가락을 잘리는 혹독한 통과의례를 다시 치르게 되는데 이것은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망의 반영으로 치루어야했던 일종
의 통과의례이다. 중요한 이 사건의 의미는 도덕적 사회적 지탄을 자신의
손가락과 바꾸었다는 점이다.
세번 째의 통과의례로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얻는다.
모든 삶은 한번쯤 이렇게 의미와 무의미의 갈등 속에서 호된 진통을 겪는다.
그리고 그
무의미를 넘어서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선 에이다 같이 손가락을
잘리는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에이다의 손가락은 그냥 손가락이 아니라 피아노를 치는 손가락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오른 손의
장지이다. 그녀는 이 손가락을 주고 '사랑'을 얻어
무의미의 삶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아있다. 무의미에서 벗어나 사랑한 사람을 얻었
지만 '기대기의 삶'에선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 기대기의 삶이란
일종의 의존적이고 자아를 찾지 못한 삶을 의미한다.
에이다가 성장기에 기대기를 한 것은 그녀의 부모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었다.
그녀의 피아노에 모든
것을 바치고 피아노의 자기의 삶과 영혼을 기대게
했다.
이제 의미를 찾고 새로 출발하는 삶 속에서 그녀는 '기대기를 한 존재로써
피아노'를 이제 버려야
한다고 결정한다. 그리고 거듭나야한다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물론 영화 속에서 이런 대사나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에이다라는 한
여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녀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을 뿐이
다.
여기서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피아노를 베인즈에게 바닷속에 버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 기대기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독립적인
여자로 거듭나야 하고 자아를 가진 인간으로써 타아의 종속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이것이 마지막 통과의례이다. 그녀는 피아노와 함께 물속으로 스스로 버려지
기를 시도했다가 다시
그것을 마치 그녀의 오른 발에 걸린 신발처럼 벗어
버리고 찬란하게 피는 연꽃과 같이 깊은 심해 속에 꽃처럼 피어나듯이
물애
떠오른다.
그녀는 세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통과의례를 진정한 사랑을 획득하고 네번째
물 속에서 빠져 나오는 마지막 통과의례로 여자도 남자도 아닌....한 인간으로서의
통과의례를 마지막으로 치르게 된다.
이것은 먼 영화 속의 가상적인 이야기나 필름 속에서 만난 에이다라는 한
여인
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의미에서 벗어나 의미있는 삶을 찾으려 하는 여인들의
이야기이고 다시 의미를 자기의 삶으로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보존하려는 여인
들의 이야기다.
물론 여자들 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보편적인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남자
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나의 <피아노> 에 대한 영화보기는 아직도 마무리 되지 않았다. 먼저 <순수>란
'윤리학적
관점'에서 보기와 다시 이번의 '여성학및 인류학적 관점에서 들여다
보기'이고 다시 사랑과 '성학(性學)'관점에서 보기'가 남아있다.
이문열씨가 성냥개비 하나로 백만장의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사실 들
여다 보는 관접에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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