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이 예술이다,/런던의 문화현장을 찾아서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바람 냄새가 난다. 까미유 코로

열린문화학교 2009. 8. 2. 15:02



나에게 신선한 감동을 준 그림 1


   



         탈속(脫俗)의 풍경화, 까미유 코로

                                                   Jean-Baptiste-Camille Corot




카미유 코로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흐릿하게 그린

자연 풍경 속에서 아무런 특징도 찾을 수 없었고 작가 특유의 드러난 개성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유심히 보고 그림 속에서 부는 스산한 바람을 느꼈다.

그 바람 속에는 허무의 공간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 바람을 믿지

않았다.



그림에서 부는 바람이 아니라 내 감정이 그림 속으로 이입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두 번째 코로의 그림에서도 다시 난 바람을 느꼈다.




정말 그의 그림에서

불어오는 바람인가 의심하며 세 번째 그림을 보았을 때 역시 한 구석에서도 난 또

그의 바람을 느끼고 그의 그림 안에 고여있는 바람을 보았다.





그의 그림 안에는 이렇게

늘 바람이 흐른다.


  코로는 늘 한 구석을 빈 공간으로 비워 놓고 바람을 채워 놓고 있다. 허전한 빈 공간은

허무를 불러일으키기 쉽고 바람은 을씨년스럽고 마음을 스산하게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이 머물고 있는 그 공간은 놀랍게도 탈속(脫俗)의 냄새가 나고 신선함이 느껴

진다.

당연 그의 그림을 바라보면 즐겁다. 그리고 몇 분 만 그의 그림 앞에 서면 그림 속의 풍경

속에 서 있는 듯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의 작업은 무특성 속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배제하고

자연을 관조하는 작업과 무심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서양 놈의 그림에서 탈속의 냄새라니, 그것도 자연에 대해서 겨우 눈을 뜨기 시작할

1800년대 중 반에......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자연을 언제나 적대적인 관계나

정복하고 이용할 대상으로만 생각했었다.



  서양풍경화의 전통적 두 조류



  종교혁명이 일어난 후 네덜란드의 청교도 지역에서 시작된 자연에 대해 묘사를 시작하고

그 것이 전반적으로 유럽 전역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부터였다. 그러나 대부분

자연의 외관적 아름다움이나 일정한 주제를 곁들은 배경으로 자연은 묘시되었을 뿐이다.


  이런 서양과 달리 동양에선 자연을 친밀한 대상으로 여겨 일찍부터 많은 풍경화가 양산

된다.  자연을 바라보는 입장은 대부분 호연지기의 인격 수련, 삶과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동양의 그림 속에서도 탈속의 서정을 담은 그림은 흔치 않다. 도가의 그림에서

간혹 세상을 초월한 탈속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일반인과는 먼 신선들과 높은 도를

이룬 도인들이 주인공으로 자연은 부속된 배경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성장한 화가의 그림에서 탈속의 정서를 담고

있다니.....난 코로의 그림을 찾아보았다. 몇 점이 우연히 그런 정서가 느껴지게끔 그려지고

그것은 우연의 결과일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화가나 음악가, 시인들은 자기의 정서를 조절하지 못한 상태나 감정의 분출

속에서 우연한 내적 경험을 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증거를

찾아내려고 나는 코로의 전 그림을 뒤져 본 것이다.


  놀랍게도 그 같은 정서는 그의 것이고 그것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그의 후반기 전 작업

에서 풍겨 나오는 공통된 특징이었다. 자연 경관을 대상으로 그리는 예술가들이 대부분

자연을 옮기고 자기가 보고 느낀 공간을 화폭에 옮기는데 대부분은 그것의 아름다움이나

조화, 사회적인 주제를 공감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조형화한다. 카미유 코로는 그것을 자연의

물질 자체를 초월하여 탈속 화 시키는 분위기를 연출해 보이고 있다.


 어떻게 이런 작업이 가능했을까?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자연스럽게 답을 찾아낼 수

있다. 까미유 코로는 파리의 부유한 유태인 상인 부부의 삼 남매 중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발공이었고 어머니는 모자 제조공이었다. 모친의 가게가 파리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중산층들에게 인기를 끌고 성공하며 사업이 번창하자 부친은 가발 제조를 포기하고

모자 가게 사업을 함께 경영했다.


 코로는 북부 도시 Rouen의 보딩 스쿨에 보내졌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유태교의 장로의

시골집에 머무르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 다른 유명화가나 천재들과 달리 아무런 재능도 발휘

하지 못한 아주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림에서도 단 한번 상도 받아보지 못해 아무도 미술에

재능이 있으리라고 짐작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가게에서 누가 뭐라고 하면 얼굴을 붉혔던 19살의 성장이 늦은 큰 아이였을 뿐이다.

아버지는 아마도 그가 랍비가 되기를 희망했던 것 같았으나 수줍음을 잘 타는 소박한 청년에겐

아무런 재능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의 부친은 그를 포목상의 조수로 보내 상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코로의 성품은

상인들이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참고 견디질 못했다. 다시 견습

상인을 포기한 코로는 26살인 1821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풍경화를 주제로 선택한다.


  그러나 이때 파리 화단의 주류는 신고전주의로 역사적인 소재나 무거운 내용으로 그의 그가

그리고 싶었던 자연을 묘사한 풍경으로 전혀 눈을 돌리지 않던 시대였다. 당시의 풍경화는

남부 유럽과 북부 유럽의 스타일로 구분된다. 전자는 단순한 자연을 신화나 역사적 장면을

담은 자연경관 후자는 건물이나 토포그라피(topography)적 지형묘사에 서민들의 생활을

곁들인 모습이 주제로 담긴 경향이었다.


 카미유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에 당시의 네오클래식의 화가였던 (Achille-Etna Michallon)

에게 1821년부터 22년까지 교습을 받는다. 그는 신 고전주의 경향의 데상과 묘사 수업을

받으면서 한편으로 화구를 챙겨 노르만디의 해안가나 중부의 숲 지역(Fontainebleau)를 다니고

파리 근교에 그의 부친의 별장이 있는 교외 지역(Ville-d’Avray)에서 스케치를 했다.


  1825년 이탈리아를 방문해 그가 좋아하던 레오나르드 다 빈치를 공부하며 자연과

인물에 대한 묘사법을 체득하며 1828년까지 머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시골을

전전하며 자연의 빛과 사물의 형상에 대하여 연구하며 본격적으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해 1831년에서 33년까지 살롱전에  출품한다. 그러나 신고전주의 경향의 양식에

대한 미련과 갈등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탈속의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두장의 풍경화는 그가 신고전주의 스타일

사이에서 방황하며 습작하던 시절의 그림들이다, 이 두장의 그림에는 물론 신선한

바람은 느껴지지 않는다. 정확하고 뚜렷한 채색으로 눈에 들기 위한 그림으로

당시의 일반인과 신고전주의에 길이든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다.



당시 주류는 신 고전주의였고 화가로써 인정을 받기 위해선 대세의 경향을 피할 수

없었고 그것을 그는 외면하지 못했다. 이 같은 까닭에 다시 두 번째 로마와 베니스로

떠나 다시 그림 수업을 한다.



그가 탈속의 풍경화를 그릴 수 있었던 까닭


그가 탈속한 풍경회를 그릴 수 있었던 까닭을 그의 생애를 학습하며 나는 발견하고

만다. 카미유 코로는 인체의 누드 데생 연습을 통해 그것을 묘사하며 벌거벗은 자연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사생하는 법을 습득한다. 그는 실제로 그의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만약에 그가 어떤 기교적 트릭 없이 참모습을 묘사하려면 누드를 학습하는 것은

풍경화가에겐 최고의 수업 방식이야.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풍경화를 결코 그릴 수 없다.‘

“The study of the nude, you see, is the best lesson that a landscape painter

can have. If someone knows how, without any tricks, to get down a figure,

he is able to make a landscape; otherwise he can never do it.”



 인체는 자연의 축소판이다. 인체에 대한 균형 감각이 없이는 사실상 자연에 대한

균형과 조화를 체험하기가 쉽지 않다. 노동이 숭고한 것은 지식이나 학습이 없이도

그것을 통하여 몸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는 벌거벗은 인체를 묘사하듯 벌거벗은 자연의 모습을 묘사하기를 노력하고

마침내 만년에는 그 같은 그림을 그리고 만 것이다.


 

내가 까미유 코로의 그림에서 바람 냄새를 맡고 탈속의 분위기를 느낀 것은 내

기분이나 감정이 아닌 순전히 그의 그림 속에 배여 있는 것을 나는 다시 그의

삶 속에서 확인하고 만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9월 20일 까지)

코로에서 마네까지의 전시를 보고


<은시의 글/ 나에게 감동을 준 몇 장의 그림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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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19세기 초에 세계를 장악하고 주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와 문화사를 주도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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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당시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

죠셉 맬러드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에 대한 미적 인식에 대한 확보가

안되어 세계 미술사를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프랑스의 코로에서 이어지는 바르비종 파, 인상파들이 존 콘스타블과 터너의 본질을 계승해..

18세기와 19세기에 이어 20세기 초까지 미술사를 주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