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보봐리즘
오늘 아침, 첫번째 산책을 하면서 종교의 착시현상과 보봐리즘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
종교적 착시 현상에는 보봐리즘을 적용할 수 없을 것 같다. 종교는 원래
환타지적 요소와 인간의 본능적 희망과 갈구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
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경우를 보면 석가는 자신이 천국도 극락도 부정하고 사람이 죽
으면 재가 된다고
그의 제자 아미타에게 분명히 말했다. 지금 대승불교의 환생과
극락은 모두 사실 인간들이 불타의 진리를 바탕으로 종교로 만들기 위해
꾸며낸
불확실한 가설이라고 봐도 별 무리가 없다.
불타의 진리는 누구나 불타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중심이고 그것은 사실 종교
로 만들 수 없는
일종의 수행 구도 철학일 뿐이다.
한국 불교의 큰 집인 조계종의 예를 들어도 조계종은 달마와 혜능 임제의 바탕을
이어 받은 선종으로
사실 선맥을 잇는 불가의 전통이 주류이어야만 하고 선과
수련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이어야 하는데...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을 두고 껍데기인 부처를 절에 두고 기복 신앙으로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고 말한 부처에게 부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극락장생
하게 해 달라고 시주하고 입시 시험에 좋은 성적에 올려 달라고
시주한다.
그리고 염불에 더 관심이 많은 스님들은 시주를 많이하고 빌면 이루어진다고
착시 현상을
부추긴다.
한국의 기독교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사실 중세 캐톨릭에서 성당을 증축
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고 타락시킨 것과 조금도 다를바가 없다.
종교적 보봐리즘으로 보이는 일반인의 현상은 보봐리즘에 보이는 것과
같이 본인
이 구축한 이상적인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자아나 자기 신념을
그 때 그 때 신앙심에 의지해 차용하기
때문이다.
보봐리즘의 현실적 자아 유기는 지속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 자아대신 본인
이 구축한 이상적 자아로 대치를
한다. 그러나 종교적 신탁에 의지해 현실적
자아를 유기하기위해 이상적 자아를 구축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실을 망각하고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신의 구원관에 기대는 것일 뿐이다.
종교적 자아 유기 현상은 일종의 엑소시즘, 환타지즘과 연결된 것으로 사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만 대소의 차이가 있고....이것이 현실적 자아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정신적 상황은 보봐리즘과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닌가 가늠해 본다.
예술가와 보봐리즘
-예술가의 자기 기만과
착각
저녁 두 번째의 산책을 나가다. 어둠이 깔린 숲 길을 걸으며 예술가의 자기 기만
과 자기
착각에 대해서 생각하다.
한편으로 적당히 어루며 타협을 해가는 세상에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닌가도
살펴본다.
예술가의 착각과 자기 기만을 생각하며 주변 친구들을 하나 하나 떠올려 보았다.
자기 착각에 빠지지
않고 예술을 해도 사실 예술가로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다.
L은 정말 박식하고 천재적인 면이 있는 시를 쓰는 문학 청년이었다. 그의 달변과
그의 무궁무진장한
지식에 모든 후배들과 친구들이 탄복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신통한 시를 쓰지 못하고 방황을 하며 변변한 직업도 없이 세상을
살다 이혼을 하고
혼자 떠돌다가 몇 해 후에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부문에 당선이
되었다. 그러나 몇 편의 단편을 내고 사장되고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나의 스승 P시인은 나름대로 성공하고 문학사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그러나 그는 당신의
시쓰기로 가정은 거의 포기하고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고 말
았다.
그는 자신의 일상과 가정, 부인과 세 자녀를 담보로 시인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았
으나 과연 선생의 시가 그 네 사람의 삶을 담보로 한 만큼 가치가 있는지 나는 솔
직히
모르겠다.
이외비해 유명 감독이 된 L과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K는 나름대로
자기 예술작업을
하며 견고한 삶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나름대로 치열
하게 자기를 깍는 작업을 했다.
K는 국립사범대의 미교과에 다니다 중퇴를 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H대 신입생
으로 재 입학을
하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자기를 다듬었다. 그리고 L은 낮은 자세
로 험난한 영화판에서 살아남았다.
당시 주변에는 몇 명의 영화작업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몇 명의 미술을 하는 친
구들이
있었지만...이 둘 만이 작업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시를 쓰던 친구들은
모두 나름대로 등단을 하고 시 작업을 하고 있지만...모두
자족하는 선에서 그치고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는 친구들은 아직 없다.
예술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등단을 했어도 혹은 작품을 발표
하고 인정을
받았어도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미대를 졸업하는 사람이 한 해에
세계적으로 수만명이 될 것이다. 한국만 해도 수천명이 졸업한다. 그것은
미술을 할
준비를 갖추고 나왔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중에 살아남는 자는 단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에 성공이 목적이라면
결국은 모두다 이
살아남은 몇 사람을 장식하는 들러리 예술가에 지나지 않는다.
좀 성공하면 주변부 예술가,
주변부 예술가를 장식하는 들러리 예술가,
예술가가 되고 싶은 예술지망생 중의 하나일 뿐이다.
문제는 자기의 처지나 자기의 실력을 냉정히 바라보고 자기 착각에 빠지지 않고
자기 기만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적당히 자족하며 즐기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 착각, 자기에게 천재성이나 재능이 있다고 믿고 되지도 않은
작품을 하며 평생을
보내다가 주변부 인사로서....동네에서 알아주는 예술가로 인사
만 적당히 받다가 그렇게 간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취미의 수준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되지도 않은 작품을 하면서
자신이 대단한
것처럼 세상을 우습게 보고 사람을 우습게 보고 마치 계관 예술가
나 된 것 처럼 턱을 치켜들고 살며 때로는 독설을 품고 그 독기로
사는 삶은 정말
지양해야하지 않겠는가?
예술가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보봐리즘을 경계해야만 .....좋은 작품을 하고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더 무서운 것은 일상을 무시하고 죽이며
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기만이나
자기 착각에 빠진 예술가가 되고 싶은 예술가는 자기에게
천재성이 있다고 믿고 자기는 예술가로 일상이나 현실은 무시하고 살아도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문제는 자기만 망가지면 좋은데....주변 사람들도 그 어줍잖은
예술이 되고 싶은 예술을 위해 희생을 강요
당한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결국 자기 삶의 반영이다. 자기 기만에 빠져 있거나 자기 착각에 빠져
있는 작가는 결국
일그러진 자기를 자기의 작품 속에 드러낼 뿐이다.
<은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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