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예술

불행한 한국의 최초 여류작가 나혜석과 프리다 칼로

열린문화학교 2008. 8. 1. 15:53

그녀를 만약 당시의 한국 사회가 받아 주었다면....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멕시코의 화가인 프리다 칼로는 1907년에 때어나 젊은 나이인 1954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일생도 나혜석과 같이 파라만장하고 동성연애는 물론 니콜라스와
사랑에 빠져 남편인 디에고와 마침내 이혼을 하기도 한다. 다시 그들은
후에 재결합을 했다.

혁명적이고 정열적인 프리다 칼로는 나혜석의 성격과 비슷했다. 나는 오늘
문득 프리다 칼로를 생각하며 만약에 당시 한국 사회에서 그녀를 예술가의
도덕적 가치관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분명 프리다 칼로보다 더 좋은
작품을 남기고 세계 예술사에 남을 불멸의 명작을 남겼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늘날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전설적인 국민화가이고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
보다도 이젠 세계 미술사에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혜석의 충만한 객기와 방종을 그대로 발산하게 해주었다면 아마 프리다보다도
그녀는 더욱 발칙한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겐  충분한 재능과 우수한 머리, 현실감각과 뜨거운 피를 가진 정열
이 가득 차 있었다. 

예술가들에겐 사실 현재의 시간과 현재의 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게 해주고 넒은 이해로 지켜보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결국 나혜석을 죽인것은 당시의 사회가 아닌가?  그녀의 재능을 키우게 하
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그림만그리다 끝내는 절망 속에 빠지게 한 것은 일
방적인 불평등의 <정조>라는 우습광스런 관념이었다.

사실 당시에 그 정조 관념이라는 것은 억압된 여성의 성을 통제하기 위한 무
거운 정조대와 다름이 없었던 사회였었다.
정조란 것이 만약에 중요 사회적 가치라고 한다면 여자에게만 강요되는 일방
적인 모랄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강요되어야만 했다. 당시의 여성
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던 정조 관념은 보호 받아야할 것도 아닌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억압이었다.


남편과 불화로 이혼을 한 것은 가정의 문제이고 사실 개인적으로 그런일은 얼
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사생활로 분리시켜주고 예슬가로서
그녀를 사회에서 받아들여주고 격려해주었다면....아마도 그녀는 좋은 작가로
살아남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해 본다.

이런 환경적인 요인은 여전히 한국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 같다. 예술이 도덕을
무시해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기존 모랄이나 가치관을 넘어서야
좋은 예술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문제는 사회적 제 가치와 상충이 될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사실 나혜석은 그 뜨거운 열정과 폐미니즘 관점으로 보아서 기억할 만한
사람이지 미술작가로서는 그다지 관심을 가질 만큼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또하나 그녀는 진정한 여권 운동의 선구자로써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는 진정으로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독립의지가 전
혀 없었다는 것이다.

나혜석은 자기의 예술과 행복을 독자적인 독립의지가 아닌 남자를 통하여 달성
하려고 했다. 또 진실로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나안(裸眼)으로 들여다 보지
못해 좋은 작품을 남길 수도 없었다.





(은시의 글/ 짧은 생각)